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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하는 오타쿠 · · ⋆
시절인연

   이것이 내 인생에 얼마 없을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시절인연. 십여 년 간 책임감을 기다림으로 맞바꿔 준 그 말을, 이제 나는 완전히 믿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요란스러운 진동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어떻게 됐어?”

   “마음에 든대. 미팅 잡아 달라더라. 근데…….”

 

   꽤 오래 이어지는 정적에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떼었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올지 모를 행운의 전화가 행여라도 끊긴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화면 속 타이머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테스트 좀 보고 싶대. 포트폴리오에 왜 그, 로맨스가 없다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개고생 끝에 떨어질 낙이다. 한껏 떠올랐던 기분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그래도 정 감독님 웬만해선 테스트 보겠다는 말 안 하는 거 알지? 이번에 잘하면 앞으로 너 계속 쓸 것 같애.”

   “어떤 미친 감독이 사랑 영화에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무성애자를 써? 난 기대 안 하련다.”

   “네가 사랑을 왜 몰라! 첫사랑 있었다며?”

 

   두 번째 정적이었다. 이번에도 전화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이름의 주인을 기억해내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심장이 내려앉았을 뿐. 강재연. 가슴 깊숙한 곳에 추상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사랑했다기엔 너무 많은 걸 몰랐고,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기엔 너무 많은 걸 공유했던 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 봄바람에 고개를 내미는 들꽃처럼 불쑥 싹을 틔웠다.

 

 


 

 

 

   중학교 동창들을 들쑤시고 다닌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쓸 만한 단서는커녕 재연을 도마 위에 올려 두고 멋대로 재단하는 말만 넘치게 듣고 말았다. 손에 남은 비눗기를 씻어내며 개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을 떠올렸다.

 

걔는 꼭 보호막에 둘러싸인 느낌이었거든. 진짜 중요한 건 자기 마음 속에 숨겨 놓고 괜히 실없는 얘기들로 둘러대는 느낌.

 

   찝찝한 문장을 물기와 함께 닦아내려고 할 때, 하얀 티슈 옆으로 화려한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 찾아드립니다. 간결하게 적힌 문구와 연락처가 썩 신뢰를 주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지푸라기로 삼을 만큼은 되었다.

 

   그날로 전단지에 적힌 곳을 찾았다. 어느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중년의 퇴직 경찰이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는 그림을 상상했는데, 단정한 차림의 여자가 딱딱한 사무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들쑥날쑥하게 층을 내 아무렇게나 쓸어넘긴 듯한 그녀의 머리칼과는 다소 언발란스한 모습이었다. 김희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명함에 그렇지 않은 이름. 여러모로 통일성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재연의 정보가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이게 다예요?”

   “이름만 가지고도 찾아 준다면서요.”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이름만 가지고 오셨네. 미래여중, 당시 짧은 머리. 어느 정도요?”

   “이…… 정도?”

   “음, 투블럭.”

 

   희결은 메모지를 뒤집어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무언가 끼적였다. 그녀는 고개를 드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이어 물었다.

 

   “왜 찾아요?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도리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본 건 나였다. 부드러운 어조로 건네는 지나친 관심이 미묘하게 거슬렸다.

 

   “좋아했어요?”

 

 


 

 

 

   너무 달라서 나와는 말 한 마디 나눌 일 없겠구나 싶은 사람이 있다. 재연이 딱 그런 애였다. 쉬는시간에는 복도를 내달리고 점심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가 남자애들과 축구를 하는. 이론상으로는 중학교 3년 내내 교류 없이 지내다 남남으로 졸업해야 했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론을 깨부수는 아주 큰 변수가 있었다.

 

   “박수정이 누구야?”

 

   우리 반 교실 앞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나타난 재연이 맨 앞 자리에 앉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나는 타이밍 좋게 내 쪽으로 걸어오는 수정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와, 너 진짜 예쁘다.”

 

   수정은 멋쩍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마 너무 자주 듣는 말이라 감흥이 없었으리라. 재연은 수정이 있는 쪽을 몇 번 더 힐끔거리다가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그날부터 재연은 내게 친한 척을 해 왔다. 복도를 내달리다 우리 반 옆을 지날 때면 창문을 열어젖히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인사하기도 하고, 매일 아침 딸기우유 세 개를 사 들고 우리 반에 찾아오기도 했다. 재연의 시선은 언제나 한쪽을 향해 있었지만, 덕분에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감출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대로 괜찮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셋은 하굣길을 함께했다. 집이 가장 가까운 수정이 떠나고 나면, 그때부터 재연의 솟아 있던 어깨가 풀어지고, 풀어져 있던 내 어깨가 솟아올랐다.

 

   “수정이랑 연락하는 고등학생 선배, 수정이가 좋아하는 것 같아?”

   “답장 열심히 하더라. 싫진 않아 보이던데.”

 

   나는 진실과 소원을 조금씩 섞어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렇게 하면 그 어느 쪽도 거짓은 아닌 대답이 되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바로 수정이 꼬시는 건데. 남자로 다시 태어날까?”

 

   재연의 말에서도 비슷한 게 느껴졌다.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면 여자 막 만나고 다녀야지. 수정이랑도 사귀고, 너랑도 사귈 거야.”

 

   어떤 소원은 꼭 다음 생이 아니어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끝끝내 해 주지 못했다.

 

 


 

 

 

   며칠 뒤, 희결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찾았는데요, 정보가 좀 엉켜서 오래 걸렸어요. 강재현 씨 재작년 6월에 개명하셨고, 올해 3월에 성별 정정하셨고. 사진도 몇 장 구했는데 원하시면 전달해 드리고요. 만나 보고 싶으세요?

 

   왜인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일일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눈 옆에 점을 찍고 새 사람이 되었듯, 재연도 이름 위에 짧고 긴 점을 찍고 새 사람이 된 걸까. 이미 다음 생을 살고 있는 재연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희결은 무슨 동의서를 써야 한다면서 사무실 근처에 있는 초밥집으로 날 불러냈다. 주말 저녁 초밥집 가장 안쪽 방에서 단 둘이 오마카세를 먹으며 작성해야 되는 동의서가 있던가. 대놓고 수작질을 걸어 오니 오히려 난제처럼 느껴졌다.

 

   “누구랑 마주앉아서 밥 먹는 게 오랜만이라 좀 어색하네요.”

   “의외다. 되게 인기 많을 것 같은데.”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연애.”

 

   사케 때문인지 볼 근처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만하면 그만 할 줄 알았는데 희결이 빈 잔을 채우며 덧붙였다.

 

   “그런 거 안 해도 돼요. 연애 감정만 사랑인가. 일, 가족, 친구, 취미……. 세상에 사랑할 만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이것저것 사랑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 올 수도 있겠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사케잔을 들어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낯설었다.

 

   “우리 비밀 하나씩 이야기할래요? 앞으로 얼굴 볼 일 없을 수도 있으니까.”

 

   희결의 뺨에도 은은한 붉은 기가 돌았다. 옅은 미소를 띤 그녀의 얼굴에서 그 어떤 의도도 읽을 수 없었다.

 

   “강재연…… 좋아했어요.”

 

   처음이었다. 재연의 이름 옆에 그런 말을 붙여 본 것은. 조금 더 일찍 뱉어 보았다면 그가 아닌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까. 희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저 여자 좋아해요.”

 

 


 

 

 

   주어진 대사 하나 없이 상황을 만들고 감정을 끌어올리는 일은 수백 번을 해도 익숙치가 않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카메라의 빨간 불빛과 눈을 맞추었다. 반짝이다 못해 일렁이는 게 꼭 그날 희결의 눈 같았다.

 

   “앞으로 얼굴 볼 일 없을 수도 있으니까 몇 마디 더 해도 돼요? 부스스한 머리에 셔츠 단추는 꼭 목 끝까지 채우는 거 웃겨요. 진지한 표정으로 글 쓸 때, 정석으로 쥔 연필 아래 꼬불거리는 글씨체도 웃기고요. 궁금해할 사이도 아니면서 자꾸 궁금해하고, 밥 먹을 사이도 아니면서 밥 먹자고 하는 것도 웃겨요. 제일 웃긴 건 그쪽 비밀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어떤 소원은 꼭 다음 생이 아니어도 이룰 수 있겠다.”

 

   볼 근처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빨간 불빛이 더욱 일렁일 때쯤 나는 희결과 같은 미소를 띤 채 소리내서 울고 있었다.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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